
E M P T Y R O O M
< R I V E R & L A U R E N T >
B Y. A U B E R G I N E
그는 아주 공손한 사람 처럼 물었다.
"뭐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가 결코 고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누구는 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며 그 신을 탓하지만 사실 우리들의 설움이 더욱 처참할 수 있는 건 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신은 모든 것을 그저 보고만 있기에 그것이 서러운 거다. 차라리 신이 우리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말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떤 사물로 취급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거대한 돌덩이 처럼 말이다. 모호하고 어려운 말들로 그를 표현해 낼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에 큰 감정적 애착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로 지켜보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는 것. 분명 어떠한 관계에 신과 개인이 위치하는데에도 직접적인 교류는 없다. 따져보면 여자들이 한참 후에 가서야 울며 욕하는 나쁜 개새끼와 큰 차이가 없다.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데 정의되지는 않고 되짚으면 무언가가 있었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어 속았다 생각하는 그런 이야기 처럼 내게 사랑을 보여 주지 않는 당신을 원망하는 것이다.
"내가 뭐라고 생각해요?"
그는 꽁꽁 언 원망 때문에라도 소리 지르며 나의 멱살을 잡을 것 같았다.
로렌트 베이브, 참 온화한 이름이었다. 꼭 잘 다려진 셔츠처럼 큰 어긋남없는 남자였다. 조용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그가 '정말로' 조용하다는 것을 잘 몰랐다. 그는 재밌는 농담도 곧 잘 했고 사람들에게 아주 못되게 굴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조용해 보이면서도 재밌는 사람을 문학을 찾는 이로 비유하기 마련이었고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밌는 문학 청년, 그리고 그가 악기를 다룰줄 안다는 이유로 그 뒤로 '예술적인' 이라는 표현이 따라 붙었다. 그의 남다름을 부각시켜 예술가라고 즐겨 부르지 않았던 것은 예술가라고 하면 떠올리는 혼란스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일렬로 나열 된 단추 같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거나 자신이 도망가 버리지도 않으면서 고요하기를 원했다. 그러니 그는 정말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러기를 바라는 이였다. 모두에게 잘해주는 것은 곧 모두에게 잘해주지 않는 것이다. 본인의 온화함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거두어 간 것이다. 나와 아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난 아니라면 애초에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그는 아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말하자면 로렌은 남의 영역을 잘 지켜준다는 핑계로 스스로가 평온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일이 맑았으면 하는 사람은 내리는 비에 질린 사람일 것이다. 스스로가 조용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결코 자체로 고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았다.
"당신에게 난 뭐예요?"
그는 늘 침몰하고 있는 배를 마음의 바다에 띄워 놓기라도 한 듯 굴었다. 감정이 바다라고 한다면 그는 아무도 모르게 배가 되어 가라앉고 떠오르기를 하루에도 수십번 그렇게 반복하는 것이다. 배는 날이 갈 수록 낡아가고 바다는 한 없이 출렁인다. 때로 바다가 잔잔할 적엔 그는 잔잔함에 겁을 먹었다. 혼란스러움 없는 선택은 이제껏 없었기에 오히려 명확함이 낯설고 거짓 같은 것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는 조심히 화제를 바꾸었다. 나는 그가 뱃머리를 돌리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말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고 하여도 자신의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결혼은 나라는 배와 너라는 배가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배를 탄 것에 비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리버, 말해 봐. 너에게 난 뭐야?"
질문의 끝자락이 떨렸다. 질문은 섬세하고도 정확했다. 그는 스스로의 물음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꼭 이렇게 말해야만 답을 알겠냐는 눈짓이다. 나는 너의 말에 '도대체'가 빠졌다고 말할까 하다 이것이 내 도피처임을 알았다. "나에게 너는 무엇이냐고?" 그러나 나오는 말 또한 같다. 단지 시간을 아주 조금 벌었을 뿐이다.
만약에 내가 이 모든 것을 아무것도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그래서 진실로 처음, 그 처음으로 돌돌돌 실을 말아 다시 제대로 풀어 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만약에 내가 이 모든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 하나 짚어나가 나의 잘못과 너의 잘못을 나열하고 스스로도 그것을 깨우친다면 그 이후에라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에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면 모든 것을 짚어 이건 사실 내 어리석음이지 누구의 잘못도 아님을 말해야 할까? 만약에 내가 말한다면 그가 내 인생의 난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 처럼 결국 널 불행하게 만든 나쁜년이 되고 마는 걸까. 만약에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선택함으로써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만 하는가?
"Nothing."
"리버.."
"넌 그냥 너야. 마치 저기 놓인 저 책처럼."
나는 테이블 끝에 놓여 있는 까만 표지에 주황색 폰트로 크게 2라고 쓰여진 카뮈 전집을 가리켰다. 나는 어디로 가기로 선택한 것일까. 그 의문은 무슨 표정인지 종잡을 수 없는 로렌과 내 속으로 기어들어가 반병신 처럼 앉아 있는 나와 또, 내 손가락 끝에 달린 저 책도 모를 것이었다.
River
M i s s G l a s s, a s y o u l i k e.
리버 엘레노어 글라스.
그는 리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R는 부드럽고 V는 가팔랐고 E는 단호했으며 S는 매끄러워 뜻 그대로 흐르는 것 같은 이름이었다. 그래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관계가 변한 후에도 그 이름만은 변하지 않은 것이었다. 처음 결혼이란 것이 한 장의 서류가 서랍에 추가되는 이상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을 안 날 로렌은 종이에 무심코 쓴 리버의 새로운 이름을 설은 눈빛으로 들여다보았다. 리버 엘레노어의 뒤에 응당 붙어야 할 g 대신 놓여 있는 b가 아주 거대하게, 마치 구속구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것이 부조리하다고 느꼈다. 그는 어느 것도 귀속되지 않기를 바랬다. 로렌이 아주 드물게 다른 사람들 앞에 꺼내놓는 리버는 아내인 법은 없을 것이기에. 묶기를 원하지도 않았지만 또 밧줄을 꺼내든다 해서 그녀를 묶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터였다. 이웃의 집에 아주 오래 산다고 한들 그것이 제 집은 아니듯이 로렌은 한 번도 리버를 아내로 부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리버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날, 그는 마침내 그녀를 연인이라고 부르기까지 그만두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서류는 얇고, 형식적이었다. 똑같은 면적으로 공평이 나누어진 칸에 나란히 붙어 쓰인 로렌트 베이브와 리버 글라스라는 글씨 위에 사인을 했고, 그날 그들은 반지는 끼지 않은 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전날밤에 그들은 대화를 나누었고ㅡ"리버," "그래."ㅡ그 이상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유난히 추운 날이라 날이 밝을 때까지 로렌은 가만히 리버의 붉은 정수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같은 방을 썼고 각자의 삶을 꾸렸다. 결국 남은 것은 추운 날 돌아온 침대에 끌어안을 것이 없다면, 그때 그것을 원망할 구실이 생긴 것에 불과했다.
삶이 한 번뿐이라는 것은 되물림된 불안이다. 곧 본 공연이나 다름없는 리허설이기에 실수는 온전히 실수로밖에 남을 수 없다. 로렌은 선택하지 않았을 경우의 결과를 알지 못했고 선택을 무를 경우의 결과 역시 알지 못했다. 어느 쪽이 나았을 거라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회하지 않았고, 다만 의심했다. 리버를 아내로 부르지 않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했고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과의 하등의 차이 역시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장미를 엉겅퀴라 부른다 해서 장미가 엉겅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부르는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만들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구속이 아니었을까 하고,
로렌은 그런 의심을 했다. 까만 밤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았고 리버는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녀는 재채기를 했고 이따금 노트북 옆에 놓인 머그컵을 들어 홀짝이며 다음 문단을 고심했다. 로렌은 침대에 앉아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저녁이었다. 방의 불은 꺼져 있어 오직 리버의 책상을 밝힌 스탠드 불빛만이 빛났다. 붉은 머리카락이 전구 불빛 아래에서 희미한 광채를 내뿜는 듯 묘한 빛으로 하얗게 반짝였다. 책상 끄트머리에 놓인 카뮈 전집의 양장된 표지는 딱정벌레 등딱지마냥 번들거렸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고 그것은 로렌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리버는 고요하다기보단 초연한 여자였다. 그 내면에는 거대한 바다가 있었고 모든 일은 파도로서 밀려오고 쓸려갔다. 리버의 바다는 파도치고 있었으나 그것이 과연 요동치는지 여부는 그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타닥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에 맞춰 로렌은 으득 입술을 깨물었다. 부들부들하고 연약한 살이 찢기고 피가 새어나올 때까지 그는 깨물었다. 찢긴 혈관 틈새로 새어들어가는 고통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씁쓸함을 중화시켰고 그제야 로렌은 숨을 쉴 수 있었다.
리버, 말해 봐. 너에게 난 뭐야?
Nothing. 대답이 귓가에 울리면 그는 쨍하니 눈을 감아버렸다. 바라지 않음이 가장 강한 바람일 수 있고 어리광을 부리지 않음이 가장 강도 높은 어리광일 수 있음을 깨달았던 때 이미 관계는 끝을 보이고 있었다.